2015 세계 유럽 카페 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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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愛國歌)는 대한민국의 공식 국가이다. 가사의 작사자는 미상이고, 1919년 안창호에 의해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에 삽입해서 부르기 시작하다가1935년 한국의 작곡가 안익태가 지은 《한국환상곡》에 가사를 삽입해서 현재까지 부르고 있다.

가사의 작사자는 안창호 설, 윤치호 설, 윤치호최병헌 합작설 등이 있다. 윤치호의 작사설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애국가를 바꾸려 하였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변호로 계속 애국가로 채택하게 되었다. 이후 1948년의 정부 수립 이후 공식 국가로 채택되었으며, 2010년 국민의례규정에서 국민의례 시 애국가를 부르도록 함으로써 국가로서의 근거를 분명히 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그밖에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로 시작되는 협성회 무궁화가 역시 윤치호가 작사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윤치호가 지은 노래 중 안창호가 가사의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를 문제삼아 가사를 바꾸라고 요청하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으로 고쳤다. 그러나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안창호는 윤치호가 지었다가 본인 스스로 수정한 부분 중에서도 우리 대한 만세를 우리 나라 만세로, 이기상과 이맘으로 임금을 섬기며를 이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며로 안창호가 다시 고쳤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주요한과, 독립운동가 안태국의 사위 홍재형 등은 그가 지은 협성회 무궁화가를 안창호의 요청으로 개사한 것이 애국가의 기원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이는 한말 독립운동가인 안태국(안창호, 양기탁 선생과 신민회를 조직,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피검)의 사위인 홍재형이 안태국의 말을 회고하는 <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 > 의 내용에서 살펴 볼 수 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또 주요한은 <안도산전서> 에서 ´원래 끝 구절의 첫 가사는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임금)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였으나 1919년도부터 상해에서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는 분명 안창호가 고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전택부 역시 윤치호가 애국가의 유력 작사자라 주장하였다. 그 근거로는 첫째로, 1907년 윤치호의 역술로 출판된 <찬미가>중에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애국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 둘째로 미국에서 살고 있는 양주은이 소장한 국민가 중에 애국가가 윤치호의 작사로 되어 있다는 사실, 셋째로 해방 후 윤치호가 친필로써 ‘윤치호 작’ 애국가(사진 10번)를 쓴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1955년 벌써 밝혀졌던 사실 이라는 것이다.

Photoshoot portrait outdoor

윤치호가 지은 찬미가의 개사본이 1910년에 실렸다. 애국가가 수록된 최초의 문헌이 윤치호의 “찬미가”이고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에 애국가의 전문이 윤치호 작사의<국민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어 윤치호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9]

1902년에 윤치호가 지었다는 무궁화 노래가 애국가의 원형과 같다는 자료도 나타났다. 2006년 2월 27일에는 박정규(朴正圭) 한남대 교수가 충북 청원군에서 열린 단재 순국 70주기 추모 학술발표회 발표문 ‘신채호의 국내에서 쓴 글에 대한 고찰’중에서 애국가의 원형이 된 노래도 함께 발표하였다. 신채호가 지은 ‘광무(光武) 5년 신축(辛丑) 2월 7일 신채호 배(拜)’라고 쓴 노래와 함께 발견된‘애국가’도 있었다. 이 애국가는 현재 애국가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

윤치호안창호의 노력으로 신학문을 수용하고 체계적 교육이 시행되고 있던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느낀 바 있어 자신의 작품격인 찬미가를 저술하며 여기에 도산이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애국가를 수록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애국가의 원작자로는 윤치호 설이 유력하다. 한편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윤치호 단독작사설을 심의했을 때 찬성 11표, 반대 2표로 만장일치를 끌어내지 못하여 결정을 유보하였고, 그 이후 애국가에 작사자에 대한 결정은 없었다. 따라서 현재 애국가의 공식적인 작사자는 미상이다.

처음 애국가는 가사에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의 가락을 붙여서 불렀다. 새 곡을 써야 할 필요를 느낀 안익태1935년 11월 사 장조로 된 새 가락을 작곡했다. 새 가락을 붙인 애국가의 악보는 1942년 뉴욕한인교회 이름으로 출판 되었고 1936년 The Korean Student Bulletin 1936년 10월호에 애국가 악보 광고가 있는 것을 보면 안익태씨가 여러 방면으로 애국가를 출판하고 보급한 것으로 보인다.애국가는 1940년경에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해졌지만 한반도에는 일제의 검열로 전해지지 못했다. 1942년 8월 29일에 개국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애국가 1절 을 매일 방송하였다.

애국가가 윤치호가 짓고 안창호가 일부 개사했다는 소문은 1920년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애국가의 채택을 놓고 임정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이에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한 동지에게 ‘우리가 3.1 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했는데 누가 지었는가가 왜 문제인가‘라며 ‘작사ㆍ작곡가의 성향보다 애국가 안에 담긴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반박하였다.

애국가의 가사는 1900년대초에 쓰였으며, 작시자는 공식적으로는 미상이라고 적혀있다. 작사자에 대한 설은 크게 윤치호라는 설과 안창호라는 설 두 가지가 있다. 작사자 윤치호 설은 윤치호가 애국가의 가사를 1907년에 써서 후에 그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다는 것이다. 한편 안창호가 썼다는 주장은 안창호가 애국가를 보급하는 데에 앞장섰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08년에 출판된 가사집 《찬미가》에 수록된 것을 비롯한 많은 일제 시대의 애국가 출판물은 윤치호를 작사자로 돌리고 있는 등 윤치호 설에는 증거가 많은 반면 안창호 설에는 실증적인 자료가 부족하다.

윤치호가 지은 찬미가의 개사본이 1910년에 실렸다. 애국가가 수록된 최초의 문헌이 윤치호의 “찬미가”이고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에 애국가의 전문이 윤치호 작사의<국민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어 윤치호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닮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Just going down the street

본래 애국가 가사의 첫 절이 ‘성자 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 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라고 되어 있었는데, 도산(안창호)이 하루는 서울서 내려 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이 가사가 적당하지 않으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하자 윤치호가 도산의 생각을 물었고, 도산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을 보여주자 윤치호가 기뻐하면서 찬성하자 도산이 이를 당시 교장인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하여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또 주요한은 <안도산전서> 에서 ´원래 끝 구절의 첫 가사는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임금)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였으나 1919년도부터 상해에서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는 분명 안창호가 고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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